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그라츠 (문단 편집) == 독소전 == 2차 대전 동안 독일 공군에 복무하면서 수많은 에이스를 배출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에이스 파일럿 칼 그라츠는 1919년 1월 24일에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에서 태어났다. 1941년 가을에 동부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제52전투항공단 예하의 제8비행중대에 배속되고 해가 바뀐 1942년 2월에 첫 전과를 올리고 상병으로 승진했다. 이때부터 갑자기 격추 페이스가 급상승하기 시작하나 그는 여름까지 54대나 격파했고 그 무공으로 7월 1일에 기사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말까지 추가로 29대를 더 격추해 83대의 스코어를 헤아리고 있었다. 1943년 3월, 동부전선을 떠난 칼 그라츠는 영국 해협을 눈앞에 두고 있던 제2전투항공단 리히트호펜의 제II비행단에 배치되었다. 과연, 서부전선의 상대인 영국 공군은 소련 공군과는 장비와 훈련도 면에서 훨씬 강적이어서 그의 격추 행진에는 제동이 걸리게 된다. 그가 서부전선에서 악전고투를 거듭하면서 17대를 격추한 후인 1944년 3월에 다시 동부전선의 JG 52로 재배속되었다. 확실히, 칼 그라츠는 동부전선에 특화된 에이스였는지 러시아로 돌아오자마자 순식간에 격추를 반복하며 독일 공군에서 64번째로 100기 격추를 달성했다. 1945년 1월에는 제10비행중대장으로 임명된 칼 그라츠는 패전을 맞기 전까지 몇 주 동안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18대를 더 격추시켰다. 특히, 이 시기의 소련 공군은 성능이 진일보한 La-7이나 Yak-9 같은 고성능 전투기로 바뀌었고, 노련한 루프트바페를 상대로 실력도 좋아져 그 전투력이 일취월장한 때였으나, 칼 그라츠는 이에 개의치 않고 그와 같은 전과를 올린 것이다. 독일이 항복한 후 칼 그라츠는 미군 부대에 착륙해 포로로 잡혔지만, 며칠 후 그는 소련군에 넘겨졌다. 소련군은 그를 포로수용소로 끌고 갔고 1949년까지 고생해야만 했다. 2차 대전 동안 칼 그라츠 소위는 900회 이상 출격를 계속했고 138대를 격추시켰다. 그 중 17대는 서부전선에서 격추한 것인데, 3대는 미 육군항공대의 4발 중폭격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